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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 넘는 사람 차단하는 법 |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커피잔이 채 비워지기도 전에, 옆 자리의 손이 자연스럽게 내 구역의 서류를 넘어뜨리듯 밀고 들어온다.
"이거 지난번에 부탁했던 건데, 이번에도 좀 봐줘."
자신의 업무를 눈앞에 툭 던져두고는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며, 당신은 또다시 거절의 목구멍을 꾹 누른 채 쓴웃음을 삼키고 있다.
상대의 사정을 봐주며 매번 웃는 얼굴로 요구를 들어주었건만, 돌아오는 것은 고마움이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그것을 자신의 당연한 권리로 착각한 채 더 큰 것을 요구하는 무례함뿐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관계에서 착하고 배려 깊은 태도를 유지하면 상대도 그 진심을 알아주고 상응하는 존중을 돌려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무례한 요구를 받아도 관계가 틀어질까 두려워 쓴웃음을 삼키며 속으로만 삭이고, 호의를 베풀수록 상대의 태도가 더 당당해지는 기이한 현상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친절을 베풀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은, 안타깝게도 선을 모르는 이들 앞에서 여지없이 바닥을 드러내며 스스로를 만만한 호구로 전락시키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곤 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왜 우리가 베푼 따뜻한 호의는 상대에게 감사함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변질되어 돌아오는 것일까.
우리가 붙들어 온 통념은 명확하다. "내가 조금 더 참고 양보하면 상대도 내 진심을 알아주겠지"라는 믿음이다.
그래서 상대가 무례한 선을 넘을 때마다 "이번 한 번만 눈감아주자"라며 거절의 타이밍을 놓치고, 스스로 마음의 방어벽을 허물어뜨린다.
하지만 한 직장인이나 지인을 가정해 보자. 마감에 쫓기는 동료가 도움을 청할 때마다 자신의 일을 제쳐두고 밤을 새워가며 도와주었더니, 다음부터는 아예 당연하다는 듯 업무를 떠넘기고 사과 한마디 없는 상황은 낯설지 않다.
행동주의 심리학자 버러스 프레더릭 스키너가 설명한 조작적 조건형성과 간헐적 강화의 원리로 들여다보면, 이 현상의 본질이 선명해진다.
우리가 상대를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무리한 요구를 수용해 주는 행동은, 상대에게 "이 사람에게는 선을 넘어도 불이익이 없다"는 강력한 보상 신호를 학습시키는 꼴이 된다.
상대는 당신의 호의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수용이라는 간헐적 강화 속에서 자신의 무례한 행동이 정당하다고 뇌를 속이며 점점 더 과감한 요구를 학습해 나간다.
즉, 호의가 권리로 변하는 것은 상대의 인성 탓만 아니라, 거절하지 못하고 경계선을 지키지 못한 태도가 맞물려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다.
여기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가장 뼈 때리는 진실이 있다.
착한 사람 코스프레를 하며 모든 무례를 수용해 주는 태도는 성숙한 배려가 아니라, 갈등이 두려워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방어기제에 가깝다.
상대가 선을 넘을 때 칼같이 차단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앓는 것은, 결국 타인에게 내 영혼의 주도권을 통째로 갖다 바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주장적 의사소통 이론에서 강조하듯, 건강한 관계란 상대를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내 경계선을 명확하게 선언하는 태도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여기까지는 내 영역이다"라는 단호한 선을 긋는 순간, 상대는 비로소 당신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독립된 인격체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만약 부당한 요구와 선 넘는 언행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고민할 일이 아니라 명확한 거절과 대응의 문제다. 직장 내 괴롭힘이나 금전 관련 문제라면 노무사나 법률구조공단 같은 공적 창구의 도움이 먼저다.
당신의 호의를 당연하게 착취하던 이들을 향해 쥐고 있던 친절의 끈을 가만히 내려놓아라.
남들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도록 단단한 경계선을 세울 때, 비로소 우리의 일상은 무례한 이들의 이기심으로부터 해방되며 진짜 평온을 되찾게 될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