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과거의 기억이 불쑥

한 사람을 가정해 보자. 불을 끄고 누운 지 오 분쯤 지났을 때, 몇 해 전 동료의 발표 뒤에 건넨 농담 한마디가 떠오른다. 웃음이 터질 줄 알았는데 상대의 표정이 굳던 장면이다. 그날은 그냥 지나갔고 그 뒤로 별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 밤에는 얼굴이 뜨거워지고, 천장을 보며 같은 장면을 처음부터 다시 돌려 본다.

흔히 이런 기억은 그 일이 그만큼 심각했다는 증거라고 여겨진다. 크게 잘못했으니 잊히지 않고, 잊히지 않으니 책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다. 하지만 기억이 오래 남는 것과 잘못이 컸던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왜 하필 밤에, 잠들기 직전에 찾아올까?

낮에는 일과 소음과 대화가 주의를 빈틈없이 채운다. 불이 꺼지고 자극이 사라지면 주의가 비고, 그 자리에 미처 처리되지 못한 기억이 먼저 앉는다.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막고 있던 것들이 물러난 것에 가깝다. 여기에 하루치 피로가 겹치면 감정을 조절하는 힘도 약해지는 경향이 있다. 같은 기억이 낮에는 스쳐 지나가고 밤에는 무겁게 가라앉는 이유다.

그런데 떠오르는 것과 책망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기억은 어떻게 책망이 될까.

떠올리는 일은 어떻게 곱씹는 일이 될까?

심리학에서는 같은 생각을 해결 없이 되풀이해 곱씹는 일을 반추라 부른다. 반추는 문제를 푸는 일처럼 느껴져서 더 빠져나오기 어렵다. 왜 그랬을까,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를 따지다 보면 분석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같은 자리를 맴돌며 기분만 가라앉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져 있다.

밤마다 올라오는 질문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때 무엇을 놓쳤을까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세 질문은 답을 찾는 형식을 하고 있지만 판결로 끝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왜로 시작하는 질문은 원인을 찾다가 사람 쪽으로 방향을 튼다. 행동을 묻던 질문이 어느새 나라는 사람을 묻는 질문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이 재판은 공정한가.

그때의 나는 정말 결과를 알 수 있었을까?

결과를 알고 나면 그 결과가 처음부터 뻔했던 것처럼 느끼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은 이를 후견지명 편향이라 부른다. 밤의 재판에서 증거로 올라오는 것은 그날의 장면이지만, 그 장면을 보는 눈은 오늘의 눈이다. 

상대의 표정이 굳을 줄 알고 보니 왜 몰랐나 싶지만, 그날의 나는 그것을 몰랐다. 그날의 피로와 정보와 기분 안에서 결정했을 뿐이다. 판사는 결과를 알고 피고는 모른다. 정보량이 다른 재판이다.

기억 자체도 저장된 영상이라기보다 떠올릴 때마다 다시 구성되는 이야기에 가깝다는 설명이 있다. 그래서 가라앉은 밤의 기분이 기억의 색을 더 어둡게 칠할 수 있다. 낮에는 사소한 실수였던 장면이 밤에는 인격의 결함처럼 보이는 이유다.

그렇다면 책망은 전부 쓸모없는 것일까.

쓸모 있는 책망과 쓸모없는 책망은 어떻게 갈릴까?

연구자들은 죄책감과 수치심을 구분한다. 죄책감은 내가 한 행동이 잘못이었다는 감각이고, 수치심은 나라는 사람이 잘못되었다는 감각이다. 전자는 사과나 수선 같은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고, 후자는 숨고 피하는 쪽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같은 기억에 붙는 두 가지 문장

행동에 붙는 문장: 그 농담은 그 자리에 맞지 않았다
사람에 붙는 문장: 나는 원래 눈치 없는 사람이다

앞 문장에는 할 일이 남는다. 사과를 하거나 다음에 다르게 하면 된다. 뒤 문장에는 할 일이 없다. 고칠 수 없는 판결만 남는다. 밤마다 되돌아오는 책망 대부분이 뒤쪽 문장이라는 사실을 알면 방향이 보인다. 밤의 기억은 형벌이라기보다, 고칠 것과 놓아 줄 것을 가려 달라는 요청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 요청을 받은 밤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올라오는 기억 앞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기억을 막으려 하면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지우기보다 다루는 순서를 정해 두는 편이 낫다.

밤에 쓸 수 있는 순서

이름 붙이기: 지금 나는 같은 기억을 곱씹고 있다
질문 바꾸기: 왜 그랬을까 대신, 지금 고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려내기: 사과나 설명으로 고칠 수 있으면 내일 할 일 한 줄을 적고 닫는다. 고칠 수 없으면 그때는 그 정보로 최선이었다는 한 문장으로 닫는다
몸 달래기: 오래 뒤척이면 일어나 조명을 낮추고 다른 일을 한다. 침대와 곱씹음이 짝지어지지 않게 한다

낮의 장치도 하나 더 둔다. 자주 올라오는 장면이 있다면 저녁 이전에 십 분만 그 일을 종이에 적고 닫는다. 감정을 글로 적어 정리하는 일이 마음의 부담을 덜어 준다는 연구가 있다. 곱씹을 시간을 밤이 아니라 낮에 미리 정해 두면, 밤에 올라올 몫이 줄어드는 경우가 있다.

다만 같은 기억이 몇 주 넘게 매일 밤 이어지고 잠과 일상이 흔들린다면, 혹은 특정한 장면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몸이 놀라듯 반응한다면 혼자 견디기보다 상담 전문가와 이야기해 보는 편이 안전하다. 

마음이 버티기 어려울 만큼 무너졌다면 가까운 사람이나 의료기관, 정신건강 위기상담 창구에 지금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먼저다.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같은 밤, 같은 기억에 다른 질문을 던진다면?

다시 불이 꺼진 방으로 돌아가 보자. 굳던 표정의 장면이 어김없이 떠오른다. 이번에는 천장을 보며 질문을 하나 바꾼다. 왜 그랬을까가 아니라, 지금 고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있다면 내일 아침 휴대폰에 한 줄을 적어 둔다. 없다면 그때는 그 정보로 최선이었다고 한 문장으로 닫는다. 장면은 그대로여도 재판은 열리지 않는다.

오늘 밤 가장 먼저 떠오를 그 장면은, 고칠 수 있는 것인가 놓아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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